제주밭 열두달
억새밭, 풍요롭고 너그러운 제주의 마음
제주밭은 계절마다 대표하는 색깔로 옷을 갈아 입습니다. 노란 유채꽃과 푸른 청보리, 쨍한 초록의 청귤을 지나 가을이 되면, 제주는 온통 억새밭으로 황금물결을 이루지요. 제주엔 벼농사를 짓는 곳은 거의 없으나, 육지처럼 누런 들판을 어디서든 볼 수 있습니다. 누가 키우지 않아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때가 되면 자력으로 피는 억새 덕분입니다.
억새는 먹지도 취하지도 못하지만, 옛제주의 의식주 모든 곳에 유용하게 쓰였던 풀이랍니다. 물자가 넉넉하지 못했던 제주인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누릴 수 있는 자연을 최대한 활용하며 살아왔습니다. 갓 피어난 억새 속에서 강하고 질겨 절대 끊어질 일 없는 가느다란 줄기를 제주인들은 일찌감치 발견했지요. 억새꽃 피기 전, '미'라고 불리는 이 '생명의 끈'을 따다가 짚에 섞어서 바구니며, 테왁이며, 우장(비옷), 멍석까지,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모든 것들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바다에서처럼 들에서도 '다음 사람'을 위해 쓸 만큼만 채취하는 원칙도 지켰고요. 특별한 날이 되면, 그것조차도 만들지 못한 가난한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빌려주고 나눠주던 성품도 기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애월읍 어음리
만발한 억새밭을 보고 있으면, 제주 사람들의 풍요롭고 너그러운 마음이 절로 느껴집니다. 지금이면 어음리뿐만 아니라, 중산간 어디라도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억새밭. 그 밭을 지나면서 '다음 사람'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 보다 가난한 이웃을 생각했던 제주인의 마음을 한번쯤 떠올린다면… 화창하게 피어 바람에 흩날리고, 햇빛에 반짝이는 억새가 좀 더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