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밭 열두달
미련없이 털어내고 쿨하게 돌아서는, 참깨
요즘 길을 걷다보면 짚으로 묶인 참깨다발이 돌담에 기대어 몸을 말리는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잘 말린 깨다발을 들고 성실히 깨를 터는 농부의 모습으로, 우리도 자연스럽게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타기를 합니다. 조금도 물러설 것 같지 않았던 여름은 어느새 시원해진 밤공기에 밀려, 높아진 하늘 너머로 천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자연은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본디 '씨앗'을 얻기 위해 수확하는 참깨는 보통 5-6월에 씨를 뿌려 파종하고, 8-9월에 하얀 꽃이 피면서 잎이 노랗게 말라가면, 수확을 준비합니다. 가장 아래쪽 참깨 꼬투리가 쩍 하고 갈라지면, 째로 베어내 한다발씩 묶어 말렸다가 서너 번쯤 털어내 귀한 참깨 씨앗을 다시 얻어냅니다. 털어낸 참깨 줄기는 그대로 다음 밭의 거름이 되고요. 인간은 작디 작은 깨를 취할 뿐이지만, 버리는 것 하나 없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정성들여 수확한 씨앗은 볶아서 대부분 참기름으로 짜내고, 나머지는 양념할 때 곁들이는
깨소금이 됩니다. 기름으로 짜내고 남은 깻묵은 동물 사료로도 쓰이고요.
어린아이도 킁킁대게 만드는 참깨의 고소한 향기는 그 어떤 향과도 대체할 수 없죠. 그런
마력을 일찌감치 깨달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은 거대한
동굴문 앞에서 “열려라, 참깨!”를 외쳤을까요? 문득 궁금해 검색해보았더니, 정말로 그 당시 사람들은 참깨에 신비스러운
힘이 있다 믿었다네요. 미련없이 털어내고 남김없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쿨내 나는 참깨를 보니, 저도 어쩐지 주문을 외고 싶어지네요.